때로는 천천히 가도 괜찮아, 그 여행 - 스위스
- 2018.11.13
- 에디터 : 류시형
난 고향 집으로 갈 때 버스보다 기차를 타는 편이다. 기차는 창밖 풍경을 방해하는 고속도로 펜스 같은 장애물이 없으며, 옆 좌석 승객이 종종 바뀌는 변화가 여행 기분 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빨리 다니는 여행보다는 느린 여행이 좋다. 경험상, 아무리 빠른 교통수단을 타고 시간과 일정을 효율적으로 짜도 절대로 모든 것을 경험할 수도 볼 수도 없다. 물론 ‘많이’ 볼 수 있겠지만 깊게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차라리 느린 여행이 좋다.
한 장소에 머무르며 걸으며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다. 스위스 하이킹 여행은 그런 느린 여행을 원한 선택했다. 유럽을 갈 때마다 ‘파리는 한 번 더 가야지’, ‘체코에 들러서 맥주 한잔 마셔야지’ 하다 보니 동선이 늘어나고 일정이 빡빡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지역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고 온전히 스위스만 탐닉하기로 했다. 천천히 걸으며.
들길, 산길이 반겨주는 스위스를 충분히 느끼는 방법
여행을 준비하다 ‘스위스 제주 올레 우정의 길’을 알게 됐다. 이름만 들어도 어떤 느낌인지 이해할 수 있다. 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아니지만 스위스의 자연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다양한 트레킹 코스와 우리나라 제주의 올레길이 협약을 맺고 ‘우정의 길’이라는 이름을 붙인 곳이다.
그 중에서도 할리우드 배급사인 파라마운트 픽처스의 로고에 등장하는 설산으로 잘 알려진 마터호른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체르마트 5개 호수길, 융프라우와 아이거, 묀휘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쉴트호른, 007 제임스 본드 체험길, 마지막으로 스위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융프라우 지역의 아이거 길까지 총 3개의 코스를 일정에 넣었다. 매 일정이 산에 오르는 것이어서 등산화부터 스틱, 가벼운 배낭, 물통 등 챙겨야 할 짐이 많았다. 하지만 무조건 날씨가 좋다는 7월, 사진 찍으면 그대로 달력이 된다는 스위스의 알프스를 걸을 생각을 하니 무거운 배낭까지 가볍게 느껴졌다.
여기는 스위스, 느린 여행이 잘 어울리는 곳
두바이를 경유해 취리히에서 하루를 보낸 후 루체른, 융프라우, 뮈렌, 쉴트호른, 체르마트로 이어지는 일정은 보통 아침에 다음 도시로 이동하고 점심을 먹은 뒤 하이킹을 하는 식이었다. 슬로우 트래블을 하겠다면서도 많은 코스를 계획한 걸 보니 욕심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빠듯했지만 무조건 한 도시에 하나의 하이킹 코스를 ‘천천히, 충분히 느끼며’ 걸어보겠다고 다짐했다.
첫 번째 도시인 취리히는 시간 부족과 알려진 코스가 없어 구시가를 걸었다.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 여행정보센터다. 한 장의 지도로 아는 길도 현지인에게 물어 찾아가는 나만의 방식을 따랐다. 우선 취리히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취리히 대학교를 거쳐 폴리반 역으로 내려와 니더도르프 시가지를 걸었다. 중세의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상점과 건물, 울퉁불퉁한 돌바닥으로 된 거리는 부다페스트의 음울한 분위기와도 닮아 있으며 심플하면서도 오래된 느낌은 마치 자그레브 같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좁은 공간에 높게 솟은 건물을 보면 암스테르담 같기도 했다.
두 번째 도시인 루체른에서는 근처의 리기산 하이킹 코스를 걸었다. 루체른에서 유람선과 산악 열차를 몇 번이나 번갈아 탄 후에야 리기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탁 트인 시야, 상쾌한 바람을 느끼는 순간 이제서야 스위스에 왔음을 실감했다. 만년설은 없지만 멀리 비슷한 높이의 산들은 한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었다. 더운 날에 눈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짜릿함은 없지만 은은하게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리기산을 오르는 등산객 대부분이 연령대가 높았다. 느긋하게 걸으며 스위스를 충분히 느끼는 이들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그 과정을 충분히 느끼고 여유를 즐기는 여행으로 리기산은 최적지였다.
트래블 트레이너와 함께 자연에 빠지다
리기산이 스위스의 대자연을 느끼기 위한 워밍업이었다면 본 게임은 인터라켄부터였다. 스위스 관광청에서는 여름철 여행객을 위해 트레킹 코스를 잘 알고 건강한 걷기 여행을 돕는 전문 가이드가 함께하는 ‘트래블 트레이너 프로그램’을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인터라켄부터 트래블 트레이너와 함께 걷기로 했다. 여행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한다는 것은 굉장한 이점이다. 흔히 여행지에서 찾고 싶어 하는 로컬만 아는 맛집, 길, 멋진 장소를 잘 안내해줄 수 있어서다.
인터라켄 트레킹에서는 그런 정보가 굉장히 중요했다. 날씨에 따라 풍경이 가장 멋있는 트레킹 코스가 변한다는 정보는 인터넷에도 나오지 않았다. 잿빛 하늘에 비가 내리자 트래블 트레이너의 추천으로 코스를 아이거 트레일에서 아이거 글래처로 변경했다. 생소한 코스여서 사람도 적어 넓은 들판에 일행만 있다고 느낄 만큼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클라이네 샤이덱 근처에서 우연히 만난 쌍무지개도 좋았고 소박하게 핀 이름 모를 들꽃도 좋았다. 흐리면 흐린 대로 좋은 스위스였다.
다음날에 마주한 뮈렌은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속 세상 같았다. 절벽 위의 작은 마을 뮈렌은 관광객이 ‘거쳐 가는 마을’이라 머무는 여행자가 별로 없다. 산악 열차를 10분 정도 타고 올라가 알멘드후벨에서 뮈렌으로 내려오는 하이킹 코스를 걸었다. 시골 마을을 가볍게 산책하는 듯한 이 길은 뮈렌을 스치지 않고서도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코스였다. 양떼가 다가올수록 커지는 방울 소리, 드문드문 보이는 스위스의 전통 나무집, 히말라야의 산양처럼 가파른 경사에서 풀을 뜯고 있던 누런 소. ‘평범해 보이는 일상도 아름다울 수 있구 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본 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해졌다. 서울의 하늘이 생각나지 않았다. 미세먼지로 가득한 잿빛 하늘이어서인지, 손에 든 스마트폰에 시선을 빼았겨서인지. 많은 것을 잡으려고 아등바 등했는데 정작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었다. 하물며 일상을 벗어난 여행에서조차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겠다고 빠듯한 일정을 짜며 흐뭇해 하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모든 걸 움켜쥐려고 정 신없이 달렸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공해가 전혀 없는 마을, 시간이 천천히 흐르던 곳
뮈렌의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체르마트는 겨울이 면 스키를 타는 이들로 붐비는 유명 관광지다. 이 탈리아 근처라서 언어도 바뀌고 자연환경도 달랐 다. 아늑한 느낌이 드는 작은 마을은 스위스 전통 가옥으로 이뤄졌고, 캐나다의 휘슬러 빌리지처럼 활기찬 느낌이 나면서도 사방에 솟아오른 설산 덕 분에 자연의 중심에 있는 한가로운 캠프장 같은 분 위기도 든다. 수네가로 오르는 기차가 있는 동네 뒤편은 묘한 회색 물이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때문 인지 관광객이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체르마트는 무엇보다도 ‘스위스!’하면 떠오르는 깨 끗한 자연이 있다. 환경을 위해 전기자동차만 허용 된 마을, 어디서든 흰 눈이 쌓인 마터호른을 볼 수 있는 곳, 하늘을 담은 호수는 어디에서도 쉽게 찾 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체르마트에는 황량함과 척 박한 땅부터 시작해 나무가 울창했던 서늘한 숲, 따스함이 느껴지는 들판, 에메랄드 빛 호수 등 다 양한 자연이 공존한다. 5개 호수 중에 특히 좋았던 곳은 마지막에 걸었던 수네가 근처 호수였다. 마터 호른이 정면에 보이는 좁다란 길에 살랑살랑 불어 오는 바람이 좋아 돗자리라도 깔고 낮잠 한숨 자고 싶었던 곳,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다니 고 밤낚시를 즐겼던 추억이 떠오르는 곳이었다.
느림의 미학
창피하거나 말거나 연신 셔터를 눌러대고 어딜 가 나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환호를 지르던 여행. 어쩌 면 나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을지 모 르겠지만, 스위스는 그런 곳이다. 이전에도 왔었 지만 올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변화무쌍 한 곳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주 정적인 곳이다. 문 명이 비껴간 듯 예스러운 산골 마을을 지나 아늑한 숲길, 너른 들판의 오솔길을 걷다 보면 시간이 잠 시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신기하게도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고 그리워진다. 또 내가 했던 선택, 빨리 가겠다며 놓친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느려진 시간만큼, 많아진 생각만큼 더 많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스위스의 다양한 모습은 꼭 빨리, 많은 도시를 다 녀야만 더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려진 관광지보다 작은 산골 마을의 일상이 더 깊은 인상 을 심어줬던 스위스. 바쁘고 빨라야 하고 이겨야 하는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느린 여행을 하며 한 번쯤 여유를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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