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만난 사람들] 김치버스 이야기

김치버스 이야기, 어떻게 시작했을까?



사실 시작은 그랬다. 가벼운 여행, 아니 1년 정도 떠나는 자동차 세계여행이니 그리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뭐랄까 무거운 사명감, 책임감, 애국심 그런 건 없는 그런 단순한 세계여행이었다. 그 전에 무전여행을 다녀와서 바로 했던 생각, 그땐 돈이 없어야만 할 수 있는 경험을 했다면 다시 한번 세계일주를 가서 돈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경험도 하고, 차를 가지고 가서 나 같은 히치하이커를 태워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하루는 있지도 않았던 여행차량에 이름을 붙여주기로 했다. 왜 유난히 뭐에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그런 친구들 있지 않은가. 내 주변에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한국적인 이름, 하지만 모두가 알만한 그런 단어를 포함한, 그리고 친근감 있는, 귀여운…. 여러 후보 중에 김치버스가 선택됐다. 그땐 단순한 생각으로 ‘여행 다니면서 김치 만들어서 팔면 되겠다’라거나 ‘진짜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시작됐다. 김치버스 세계일주는.


가벼운 시작과는 다르게 김치버스 세계일주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변해갔다. 개인적인 세계여행이 아닌, 400일간 세계 곳곳을 김치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한국과 한국의 김치를 알리는 목적성 짙은 프로젝트 여행으로 말이다. 물론 그 3년이란 시간 동안 실패와 좌절, 끝없는 도전과 인내가 있었다.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건 꿈에 관한 이야기다. 포기하지 않은 꿈

한식 세계화에 대한 간절함이나 여행의 갈증, 현실적인 커리어의 문제가 아닌 꿈,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그런 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갖고있다. 아니 있었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꿈을 향해 다가가는 사람도 많지 않다. 항상 ‘뭐 하고 싶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많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 현실에서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난 그런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시작했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고,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처음 세계무전여행을 떠났을 때 출발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고 처음 책을 썼을 때도 3년이나 걸렸다. 그리고 이번 김치버스 세계일주도 3년이 걸렸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생각했던 대로 이루어 지는 건 없다. 불빛 없고 좁은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는 대로를 만나기 마련이지만 사람들은 항상 많은 이가 이용하는 대로를 택한다. 나도 몇 번이고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날 다시 일으켜 세워준 건 ‘역시 꿈을 위해서만 살 수는 없어, 현실을 생각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보란 듯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꿈을 져버리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면 그렇지’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구나, 내 꿈은 뭐였지, 나도 다시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말이다.




이제부터 ‘김치버스의 꿈’ 얘기를 해볼까한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요리사가 꿈이었다. 살면서 직업으로 가져야 하는 건 제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제일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당시에 제일 즐거웠던 일이 요리였다. 꿈에 그리던 경희대학교 조리과학과에 입학을 하면서 본격적인 요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각종 요리 자격증을 따고, 대회에 나가고 선배들의 주방에서 일하기도 했다. 또 학교 앞에서의 김밥 장사, 오픈 하는 주방의 메뉴 컨설팅, 파티 케이터링, 서바이벌 방송에서의 케이크 굽기 등 정말 다양한 일을 했다. 정말 즐거웠다.


처음 해외여행을 떠났던 이유도 요리 때문이었다.그냥 일반적인, 알려진 요리가 아니라 그들의 가정에서 먹고 즐기는 식문화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이 실제로 집에서 먹는 음식, 어떤 면에서는 꾸미지 않은 그런 음식들을 보면 그들의 문화, 그리고 요리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무전여행이었고 220일간의 세계무전여행은 내 인생을 온전히 바꿔버렸다. 요리보다는 나를 도와준 사람들, 여행 중에 만난 그런 사람들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 이랄까. 건방지게 말하자면 ‘인생의 해답지’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 후 책을 쓰게 되고 강연을 하면서, 내 경험담을 얘기하면서 느꼈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을 현실적인 제약 속에서 이뤄내는 내 모습을 부러워했다. 정말 이상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건데 왜 그렇게 생각할까. 왜 대단하다고 생각할까. 꿈이 더 선명해진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꿈을 꿔야 한다는 것. 그런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나만의 꿈, 모두가 여행 생각에, 혹은 명예, 돈 때문에 다른 것을 생각할 때도 나만큼은 김치버스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3년 동안 기획서를 몇 번이고 수정했는지 모르겠다. 몇 군데의 기업을 찾아갔는지도 셀 수 없다. 수많은 거절의사를 들었고 단 한번도 긍정의 대답을 얻지 못했다. 출발 일정은 7월에서 10월로 밀렸다. 모가 되든 도가 되든 출발은 해야겠고, 여기저기 지인에게 돈을 빌려 차와 필요한 물품을 사고 정말 하루하루가 치열했다. 스폰서와 계약을 한 것도 출발한 이후였고, 협찬 금액도 러시아에서 받았다. 2011년 10월 23일, 출발하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11월 초가 되어 사람들에게 빌렸던 돈을 갚고 진짜 내가 생각했던 여행을 하기 시작하면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젊었고 오만했으며 우스웠고 극단적이었으며 성급했다. 그래도 우리는 옳았다.’

애비 호프만(Abbie Hoffman)의 명언이 머리를 스쳤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떠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기다렸다면 아마 영영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400일간의 세계일주는 그렇게 시작 됐다

외국어를 잘하거나 김치를 잘 담갔던 것도 아니다. 버스 운전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당연히 차량 정비는 몰랐다. 말 그대로 오랜 시간 준비했지만 준비되지 않은 여행이랄까. 내가 준비하지 못한 것들이 막 여기저기서 튀어나와서 괴롭혔다.


400일간 러시아, 유럽, 북미를 여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한국의 음식, 음식문화를 알리는 다양한 시식행사를 진행했다. 그건 우리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팀원 모두가 요리를 전공한 요리사였으니…. 반면 그 시식 홍보행사 외엔 모든 게 부족했다. 전문적으로 통역을 하지도 못했고 차량이 고장나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당황하기 일쑤였다. 이동하는 내내 차량이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무래도 중고차를 개조하다 보니 그런 잔고장이 많았던 것 같다. 생각지 못했던 잔고장에 정비비용은 늘어나기 시작했고 후원 받은 비용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런 악순환 속에서도 김치버스를 포기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이 모든 게 ‘나의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던 시간을 버티며 설득하고 3년만에 떠났는데 우리의 능력 부족,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20대를 정말 다양한 여행을 하면서 보냈는데 김치버스는 힘든 건 둘째치고 여태껏 해왔던 여행과는 확실히 달랐다. 후원을 받아 여행하는 것,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뤄야만 하는 여행은 프로젝트 같은 ‘일’의 성격이 크다 보니 여행과 일의 밸런스를 잡는 게 쉽지가 않았다. 여행은 ‘의무 없는 일상’이라고 정의하는 나지만 의무가 있는 여행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것마저도 여행은 여행이다. 분명 인생에서 다양한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것도 많고, 그 안에서 실망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당신의 선택’이고, 그것 역시 ‘여행’이다. 그냥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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