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떠난 제주도 여행기
깊은 생각 없이 즐기는 자유로움
- 2018.12.17
- 에디터 : 류시형
‘바다를 보고 싶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때마다 청춘이 그립다. 이제는 떠나고 싶다고 당장 떠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벌려놨고 일에 대한 책임감도 무겁다. 여행을 간다면 어디로 갈지, 얼마나 들지, 치밀한 계산이 서야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청춘이라면, 의무와 책임은 잠시 접어두고 좀 더 가볍게, 깊은 생각 없이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지 않을까?
Again 제주여행
블로거로 한창 활동할 때, ‘트래비뉴’라는 온라인 여행카페를 운영한 적이 있다. 카페 개설 후 가장 먼저 했던 이벤트는 신규회원 중 한 명을 추첨해 운영진과 함께 떠나는 제주 캠핑여행에 초대하는 것이었다. 나름 여행 블로거로 인기를 누리던 친구끼리 모여 만든 카페여서 서로 만나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도 많았고 함께 여행을 가고 싶다는 나름의 팬심을 지닌 이들도 있어 가능했던 이벤트였다. 첫 이벤트는 대성공이었고 그로 인해 카페는 활발하게 운영됐다. 1년 후, 당시 캠핑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떠나기로 했다. 추운 겨울비를 맞아가며 고생했던 캠핑이었지만, 겨울의 캠핑만큼 추억 만들기 좋은 여행이 있을까. 걷고 먹고 마시는 콘셉트의 즉흥적인 ‘트래비뉴 Again 제주캠핑’.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은 가벼운 여행
여행의 시작은 펜션 협찬이었다. 우리는 제주도 한 펜션의 “혹시 여행 계획이 있다면, 펜션에 들러 편안히 묵고 후기를 올려달라”는 제안을 덥석 물었다.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고급 펜션이었고 거기에 독채라는 매력에 빠져 제주여행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셋이 머물기에는 너무 넓다는 생각에 여행카페에 글을 올려 즉흥적으로 동행할 사람을 모았다. 물론 마지막 날 협찬 받은 펜션에서의 1박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당장 떠날 수 있다는 지원자 몇 명이 등장했고, 각자 비행기 표를 결제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여행은 시작됐다.
일면식 없던 5명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한 공항에서, 아무런 계획과 준비가 없다는 사실에 지원자들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여행의 큰 흐름은 있었지만 어떻게 이동할지, 첫 도착지인 금능해수욕장에 가서 무엇을 먹을지, 텐트는 어디에 자리를 아야 하는지 무엇 하나 결정된 바가 없었다.
필요한 건 즉흥적으로 해결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그런 여행의 첫날 저녁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텐트 치는 것만으로도 벅찬 저녁 시간, 랜턴 하나 없이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화장실 옆에 텐트 두 동을 친 후, 4km 정도 거리에 있는 마트까지 히치하이킹으로 먹거리를 사러 가야 했다. ‘캠핑에는 고기’라는 중지에 힘입어 고기를 사왔지만, 아뿔싸 구울 수 있는 프라이팬이 없었다. 근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가 프라이팬을 빌렸다. 뭐든 이렇게 닥치는 대로 필요한 것은 그때그때 해결하는 여행이었다. 이러한 무계획 여행이 처음인 이들에게는 순간 순간이 낯섦의 연속이었지만 이내 동화되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줬다.
본격적인 여행은 지금부터
이튿날,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하룻밤 텐트에서 잔 것만으로 온 몸이 뻐근했다. 금능해수욕장에서 가볍게 몸을 풀고 대충 아침을 해결한 뒤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지만 마냥 걷기에 좋은 날씨였고, 여행도 걷기 위한 캠핑 여행이었으니 불평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제주도에 왔으니 이왕이면 올레길을 걸어 보겠노라고 선언했지만, 그 어디에서도 올레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풍경이 멋진 곳을 향해 걸었다. 비양도를 바라보며 해안가를 걷다 전복 양식장에 길이 막혀 다시 아스팔트 도로, 산길을 번갈아 지나다 만난 것은 올레길 14코스였다. 올레길은 초입과 끝 지점은 안내가 잘 되어 있지만 중간에 합류하려면 어디가 어디인지 찾기가 쉽지 않다. 한참 헤매면서‘꼭 올레길을 걸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할 때 만난 길이어서 괜히 더 반가웠다.
늦가을, 초겨울의 제주 억새와 푸른 하늘은 전날 피로를 말끔히 씻어줬다. 고행이라도 떠나듯 무거운 배낭에 축 쳐진 어깨도 수려한 풍경을 담아낼 카메라를 움직이느라 바빠졌다. 이것이 여행의 멋이 아닌가 싶다. 한참 힘들다가도 멋진 풍경에 반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만나면 소나기에 솜사탕이 한 순간 녹아내리듯 고통은 말끔히 사라지는 그런 것, 좋은 추억만 남게 되는 마력.
올레길 14코스는 도중에 음식을 요리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어려운 길이었다. 코펠에 쌀까지 씻어 준비했는데 길 한복판에 불을 피울 수는 없으니 난감했다. 그러던 차에 한적한 민가를 발견했다. 잠시 물을 얻어 쓰고 창고 앞에서 밥을 해먹을 생각이었는데, 인심 좋은 어르신이 집안까지 초대하는 바람에 모든 피로가 행복으로 바뀌었다. 혼자 식사하기에 적적했다며 반찬도 내주셨고, 우리는 우리대로 이것저것 준비한 재료로 요리를 했다. 정해지지 않은 우연한 만남, 이 역시 즉흥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이날 저녁식사는 첫날 프라이팬에 들러 붙은 목살을 떼어내며 고기를 구웠던 것에 비하면 화려한 만찬이었다. 주말이라 열려 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벽돌로 바람을 막은 후 석쇠판을 사서 올렸다. 삼겹살 숯불구이에 늦은 밤 캠프파이어까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온라인 회원들이어서 어색했고 계획도 없는 즉흥적인 여행이 낯설기도 했지만 어느새 모두가 점점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이 여행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생애 최고의 올레길 12코스, 생이기정 바당길
셋째 날은 저녁에 펜션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즐길 수 있고 고기 기름이 허옇게 굳어버린 식기를 깨끗하게 씻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전날의 과음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텐트 속 침낭이 익숙해져서인지 다들 늦잠을 잤다.
마지막 날도 역시 무계획이었다. 차량을 렌트해 돌아다닐 생각도 했지만 과정도 복잡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 그냥 걷기로 했다. 지도를 보고 근처의 괜찮아 보이는 차귀도로 방향을 정했다.
근처라고 하지만 거리가 가깝지 않았고 어디에서 버스를 타야 할지도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우리 앞에 멈춰선 트럭에는 인심 좋은 아저씨가 손을 흔들며 차귀도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정말 운 좋게 차귀도 앞 바다까지 왔는데, 막상 도착하고 보니 달리 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배를 타고 들어가기에는 뱃삯이 너무 비싸 결국 언덕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당산봉’이라고 쓰인 언덕은 큰 배낭을 짊어지고 오르기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차귀도를 내려다 보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40분가량 나무를 헤집고 좁은 길을 오른 후에야 눈 앞에 바다가 펼쳐졌다.
생이기정 바당길이라 불리는 이름에 걸맞게 차귀도와 푸른 바다, 하늘, 누런 억새가 조화로운 풍경에 감탄을 자아냈다. 생이기정 바당길은 제주도 방언인데 ‘생이’는 새를, ‘기정’은 벼랑을, ‘바당’은 바다를 뜻한다. 다들 힘들었는지 배낭은 대충 벗어 던지고 바람을 느꼈다. 우리는 시간이나 잠자리를 걱정할 필요도 없이 온전한 자유를 느낄 수 있었던 절벽 위의 올레길에서 한참을 보냈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예정된 고급 펜션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는 밤새 술잔을 마주하며 여행의 추억을 나눴다. 그리고 그간 나눌 수 없었던 서로의 이야기도 주고 받았다. 공항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황당함, 한 번도 이렇게 갑자기 떠나 본적 없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끌렸던 마음, 아무런 계획이 없어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느낌 등.
청춘의 특권
청춘의 여행은 이런 게 아닐까.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보고 즐기는 여행. 무엇 하나 놓칠세라 치밀하게 세운 계획에서 하나라도 흐트러지면 답답해하는 그런 여행보다 한 번이라도 이렇게 생이기정 바당길의 억새를 흔드는 바람처럼 말이다. 아무 것도 정해진 건 없지만 무엇이든 부딪히면 생각하지 못했던 인연을 만들고 낯선 풍경이 익숙해지는 여행을 즉흥적으로 아무 계획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은 청춘의 특권일 것이다. 그리고 그 특권을 누리며 온전한 자유를 느끼고 즐기는 것, 그것이 내 청춘에게 아깝지 않은 시간을 선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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